비가 오네요...사랑 서신 제005호





혜송님, 비가 오네요.

꿈이었던가 생시였던가 간 밤 내내 비 내린 것 같은데
옥 마당에 흥건이 고인 빗물을 보니 생시였나 봅니다.
옥 창 밖 초족 초족 쉼 없는 낙숫물 소리가
구름처럼 하릴없이 지나가는 상념을 일으킵니다.

옛적 고향집 다락방에서 낙숫물 뜯는 소리 들으며
입시 공부하던 생각, 삶에 대한 반추와 전망,
고향집과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등등.....

걷잡을 길 없는 상념들은 어느덧 십 오척 담장을 넘어
고향을 에돌아 종로 거리에 이르고 공덕동 산 골목 구멍가게에 이르기까지
아니 가는 곳 없이 미친 년 널 뛰듯 싸돌아 다닙니다.
끝 없는 상념의 나래짓이 급기야는
불현듯 맞닥뜨린 혜송님의 얼굴 앞에서는 그만 멈춰 서고 맙니다.
그리고는 이렇듯 황망히 글을 짓고 있습니다.

혜송님을 향한 고마움과 미안함과 기다림과 안타까움과 설레임 등이
얼키설키 혼재된 마음으로 글짓기가 두서도 없고 뒤숭숭해집니다.
여운이 작질 않았던 우리들의 9월의 대화가 아무것도 맺은 것도 없이
외려 이렇게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영롱한 불씨 하나로 남은 것을 느낄 때면
움찔움찔 가슴 떨며 놀래곤 합니다.

이게 무슨 조화일까요.
이 무슨 놀부 같은 심사일까요.
시도 때도 없이 돋아나는 기다림과 설레임이 혼란스럽습니다.

이 비 그치면 이렇듯 뜽금없이 출렁대는 혼란도 잦아들 테지만
내 가슴 속 깊은 곳 불씨마저 꺼트릴 수는 없음을 잘 알기에
영문도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어디로부터인지 스멀스멀 기어드는 이 변화는
나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지
이토록 생소한 심경적 혼란 속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느낄 때면 적잖이도 당황스럽습니다.

그래서 오늘 기어이 혜송님에게 이렇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 조용한 변화들을
우리는 그저 말 없이 느낌으로 감지하고 순응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혜송님은 지금껏 그래왔던 모습 그대로여만 하고
예전과 다른 모습이어서는 그 또한 작은 아픔으로 와 닿지 싶습니다.
그냥 예전 모습 그대로 적어도 겉으로는
어떤 변화도 감지되질 않았으면 합니다.
인적 없는 어느 산골짝의 흐르는 개울물과도 같은 자연스런 모습 그대로
나를 대하길 바랍니다.

언젠가는 이 설레임이 주체 못할 그리움으로
자연스레 전이되는 날이 오면 그 때서는 지금 애써 억누른 심사들을
허물처럼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을거라 믿습니다.
그런 날이 어서 오기를 목을 놓아 기다리겠습니다.

혜송님, 오늘 나의 글 내용과 관련해서 그 어떤 장담도 할 수가 없는
나의 심사가 고약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또 한편에선 난 여전히도 오늘 글의 내용과 상관없이
전혀 예기치 못한 또 다른 변화의 가능성 또한 감히 자신할 수 없는 처지라
혜송님을 향한 죄스런 맘 또한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나와 우리 앞에 다가서는 그 어떤 변화들을 주재할 수 있는 힘이
아직은 혜송님이나 내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이
못내 나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참 바보 같고 어이 없는 망설임입니다.

오늘 나의 이 같은 언사가 어떤 면에선
혜송님의 속을 상케 하는 부적절한 처신으로 내비칠 수도 있기에
뒤가 개운하진 않습니다만 언젠가는 혜송님과 나 사이에
충분한 이해와 공감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습니다.

요즘처럼 사고에 혼란을 일으켜 본 적도 있었나 싶습니다.
그간 살면서 사람 관계와 일 처리에 있어
진퇴를 분명히 해왔음을 자부해 왔건만
작금의 나의 모습은 스스로도 많이 실망스럽습니다.
나이 탓이나 옥중 탓으로 돌릴 수 밖에요.

이젠 어느 정도 안정하고 있을 혜송님을
또 다시 혼란 속으로 빠뜨릴 수도 있기에
아직은 무책임하거나 성급한 것도 같은 이런 얘기들을 굳이 꺼집어 내게 된 건
우선은 가을비 탓일 게고 무엇보다 가슴 속에 봇물처럼
밀려드는 설레임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치 않고선
숱한 사색의 과제들을 온전히 수행키 힘든 절박감 때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이런 나의 심사에 대한 혜송님의 백 번 천 번 양보된 이해를 구합니다.

창문 밖 국화는 피었나요.
국화의 고운 향이 혜송님의 마음을 화사하게 밝혀 주었으면 합니다.


오래 전 11월 18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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