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욕(小慾)과 지족(知足)...사랑 서신 제098호





휴가가 그리 신명나지 못해서 어쩌나요.
남들은 연중 한 번 맞는 꿈 같은 여름 휴가를
산도 좋아라 들도 좋아라 계곡도 좋아라 바다도 좋아라며
신명나게들 잰걸음치건만 혜송님은
기어이 또 십오 척 담장 속으로 빨려들고 말았군요.

갇힌 님을 두고서는 산천의 시원함을 쐬는 일도
목에 걸린 가시처럼 개운치 않을 것만 같던가요?
그리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지루하고 아픈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의 즐거움을 포기한 당신,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마음을 정돈키가 어렵네요.
“잃어버린 여름 휴가, 이 다음에 다 배상할게요”란
입에 발린 약속으로 얼버무리렵니다.

미경씨가 참 고맙네요.
많이 적적할 뻔 했던 여행길에 길동무가 되어 주었군요.
미경씨가 접견실에서 출소하면 술 한잔 사리라던 말, 참 정겨웠습니다.
근데, 술은 정작 내가 사야할 까 봅니다.
내 짝지의 말벗, 길벗되기를 기꺼이 자청하며
금싸라기 같은 여름 휴가날을 담장 안에까지 쪼개어 준
답례를 해야겠지요.
불편한 몸임에도 어찌 그리도 야물딱지고 씩씩한지
처음 대하는 낯선 이조차 편안케하는 그 당찬 표정과 처신에
감탄이 절로 솟더군요.
미경씨께 고마움과 행운을 비는 인사 전해 주세요.

지금 옥창 밖에선 소나기 소리가 시원스레 들려오네요.
비 탓인지 다시 생각나는 얘기가 있습니다.
속 깊고 당찬 여동생, 경주에 관한.....

근자에 들어 동생이 새삼스레 ‘산다는 게 뭔지’라는 화두를 놓고
생기 없는 생활을 하고 있나 본데 우려할 만큼은 아닐 것이라
애써 자위하곤 있으나 불쑥 불쑥 찾아드는 조바심도 없질 않습니다.
생각이 많고 깊은 동생인지라
쉬이 단정할 순 없을 테지만 동생의 마음이 그닥 여유롭지 않은 건
대다수 나이 찬 처녀, 총각들이 그러하듯
사랑이 비어있는 생활에서 오는 무기력한 심사 탓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이미 한 차례 사랑의 아픔을 겪은 여운도 있을 터이고요.

난 물론 사랑 지상론자는 아니지만
사람의 일생에서 남녀간의 사랑이 차지하는 그 비중과 역할을
절대 과소평가하고 있진 않습니다.
특히나 사랑의 열병을 앓아 본 사람들에겐
삶이 곧 사랑이라 한대도 아니라고 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겝니다.
그렇듯 난 동생의 생기없는 일상에 생기를 불어줄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
‘사랑’일 것임을 어설피 짐작하곤 있으나
그런 최선의 대안이 현실적으로 당장 가닥을 잡을 수 없는 것이라면
난 동생에게 다소나마 위축되고 공허해진 자신의 심기를
다스리기 위한 차선책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화두를 놓고
마음을 추스려볼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소욕과 지족 !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함이 많기에 그만큼 고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하는 것이 적기에 근심과 번뇌도 적습니다.
나아가 욕심을 줄이려 노력하는 사람은 마음이 평안하여
걱정이나 두려움이 적어지고 하는 일에 여유가 있어
그 심사가 각박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고뇌가 말끔히 사라져 해탈에 근접하니
소욕이야말로 근심과 번뇌를 줄이는 제1의 첩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음으로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면
부족함을 느낄 때조차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여건에서든 만족할 줄 아는 지혜를 지니고 산다면
맨 땅에 몸을 누일 지라도 그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으나
만족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심은 천상에 몸을 누일 지라도
그 마음이 흡족하진 않을 것입니다.
만족을 모르는 이는 겉보기엔 부유해도 그 마음은 늘상 빈곤하고
만족을 아는 이는 겉보기엔 초라해도 그 마음은 늘 풍요로우니
이를 가리켜 지족이라 할 것입니다.

하기사 소욕과 지족을 알면
그는 이미 도인의 경지에 이르런 사람이라 하겠지요.
이런 훈장 선생 같은 강론을 하는 나 자신도
그 소욕과 지족을 행함에 있어선
이제사 걸음마를 시작한 초입 수련의 과정에 머물고 있는 걸 생각하면
낯살 간지럽기도 하지만
그저, 담장 안에서 동생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는 처지를 안타까와하며
소욕과 지족의 마음으로 꽉 죄는 일상으로부터
잠시간만이라도 여유를 가져보기를 기대하는 심정으로
위의 화두들을 동생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고개 한 번 돌리면 극락이 예라 했습니다.
그렇지요, 결국 행복이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 있음을
알아가는 것, 그게 우리들의 삶을 성숙시켜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난 또 한편으론, 동생에게 삶이란 별스런 게 아니고
잘 살든 못 살든 기쁘든 슬프든 살고 있는 지금 그대로가
바로 자신의 삶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지네요.
삶이란 게 그렇게 거창하거나 복잡한 게 아니라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오신 모습이
바로 삶이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또한 삶인 게지요.
비온 뒤의 무지개처럼 휘황찬란하고 아름다운 삶이
어디 따로 예비되어 있거나 숨겨져 있는 게 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어떤 면에선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지리한 일상의 반복, 그게 바로 삶이 아닐런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다 특별나고 잘난 삶을 살아가기를
눈 부릅뜨고 찾아 헤매인다지만 눈에 띄고 특별나 보이는 삷만이
꼭 훌륭한 삶이라곤 할 순 없을 겁니다.
있는 그대로를, 처해 있는 상황 그대로를
소욕과 지족의 마음으로 차분히 받아들이며
조금씩 조금씩 삶의 이상과 희망을 가꾸어 간다면
그 결과가 어찌하든 그 또한 귀하고 복된 삶이라 할 수 있진 않겠는지요.
누군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평범한 우리들의 지금 그대로를 지그시 견디며
삶을 영위하는 것 또한 훌륭하게 사는 삶의 한 모습일 수 있다“

혜송님,
난 지금 동생이 딱히 어떤 심리 상태에 놓여 있는지
혜송님이 전해 준 바 외에는 구체적으로 알 순 없답니다.
오늘 나의 얘기들은 그간 혜송님의 전언을 근거로 나 나름대로
미루어 추측하고 생각하여 정리하는만치 동생에게
직접 글을 쓰기도 뭣하고 해서 혜송님 붙들고 얘기 나눠 본 겁니다.
어차피 구체적인 대안들도 아니고 그저 한번 어지러운 심사를
다독여주는 정도의 위안 수준의 얘기들인만치
이 다음에 동생과 대화의 기회가 생기면
혜송님의 얘기인양 자연스런 대화 주제로 나누어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동생에겐 언제나 연인같은 오빠, 아빠같은 오빠,
친구같은 오빠가 되고픈데 늘상 마음뿐이랍니다.
동생이 강한 듯 보이면서도 당신 만큼이나 여린 구석이 많답니다.
우리가 아직은 동생의 불안정한 심사를 위안해 주어야하는 건
손윗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린 동생과는 달리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란 이유 때문일 겁니다.
쏟아지는 저 빗줄기처럼 시원한 사랑이 동생에게
가득 가득 가득 내렸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동생의 어지러운 심사를 다독이는 임무까지 부여하는
나의 게으르고 못된 심보, 애교로 받아주세요, 혜송님.
잘 자요!!


오래 전 8월 1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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