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우리당은 헤죽헤죽 웃지 말라!

대통령과 우리당은 헤죽헤죽 웃지 말라!
작성일 : 2004.4.22



나는 3.12 탄핵 폭거 이후 4.15 총선에 이르기까지 군대 간 애인 제대날 기다리듯 한 달이 십년인 듯 노심초사하며 지냈었다. 노사모도 아니고 열린 우리당 당원도 아닌 나는 그저 좋은 세상, 제대로 된 세상을 염원하는 평범한 국민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열린 우리당이 좀 더 큰 승리를 목전에 두고 놓쳐 버린 아쉬움과 한나라당의 기사회생을 또 다시 바라보아야 하는 안타까움 속에서나마 과반 이상을 확보한 선거 결과를 두고 웃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또 다시 선거 기간 내내 졸인 가슴이 다시 콩닥거리게 되는 건 비단 나만의 심정은 아니지 싶다.

학교 다닐 때의 기억이다. 월례고사 후 성적표를 받아들면 1등한 친구치고 헤죽거리며 까부는 친구는 없었다. 1등한 친구는 성적표를 받아든 순간 이미 다음 시험을 예비한다. 그 묵직하고 진중한 표정 속에는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마저 흘렀다. 여유와 만족은 알 수 없는 그 묵직하고 진중한 표정의 이면에 흐를 뿐 결코 경망스럽지 않은 1등 친구의 카리스마에 2등, 3등은 주눅들기 마련이었다.

잔치는 끝났다. 탄핵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싫든 좋든 헌재 판결이라는 시험은 이미 거를 수 없는 대세다. 그 또한 일부의 국민 여론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민의를 등진 정치적 행보가 어떠하리란 것은 탄핵과 총선이라는 격동의 정국 속에서 우리 모두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나 같은 일개 민초가 어찌 대통령의 천 길 만 길 같은 속내를 다 헤아려 보겠냐마는 총선 이후 최근 보여지는 청와대와 열린 우리당의 다소 성급해 보이는 처신에 조마조마하는 심정을 억누를 길 없다. 일부 언론 매체들의 집요한 조작이 있었다 할 지라도 다수 국민들의 의식의 한 언저리엔 대통령과 열린 우리당의 '가벼움'에 대한 염려는 떠나질 않는다.

지난 1년 여 힘 없고 빽 없는 대통령이 행정부와 의회를 통해서는 자신의 개혁 정책들을 관철할 길이 없어 잦은 대국민 성명과 토론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직접 힘을 얻고자 했던 저간의 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그런 대통령의 처신들이 '필연'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가벼움'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도 한사코 외면하기는 힘든 게 현실이다. 그러기에 대통령과 열린 우리당을 반대해 왔던 국민들은 물론이고 동시에 열렬히 지지해 왔던 국민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대통령과 열린 우리당이 이제는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대통령이 '교만'을 경계하고 '겸손'을 당부하고는 있지만 나와 많은 국민들이 보기엔, 여전히 대통령 스스로 자중자애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듯하여 유감이다. 지금이야말로 '침묵이 황금'일 때지 싶다. 대통령에겐 잔인한 얘기일런진 몰라도 참은 김에 좀 더 참아 주었으면 한다. 적어도 헌재 판결이 날 때까지는 말이다.

'재신임은 대통령 스스로 판단할 일'이라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퉁박이 '조롱'으로 들리지는 않는가. 선거에서 승리하고도 무에 그리 아쉬워 3류 정치인인 박근혜 따위에게 그런 조롱을 들어야만 하는가. 재신임이니, 정동영과 김근태의 파워 게임이니, 대통령과 정동영의 파워 게임이니 하는 얘기들이 일부 언론들과 호사가들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할 지라도 적어도 한나라당이나 박 대표 따위가 대통령과 열린 우리당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빌미가 되는 '가벼움'을 내보이진 말았으면 한다.

내 보기엔 이번 총선 압승의 1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노무현 대통령이다. 총선의 승리는 대통령의 사즉생의 결단의 선물임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자명하다. 그러기에 대통령은 열린 우리당 정의장이든, 한나라당 박대표이든 그 누구에게도 경외의 대상이어야 하고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 나아가 이제 대통령은 노사모만의 대통령이어서도 안되고 탄핵을 반대한 국민들만의 대통령이어서도 안되고 전 국민을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거듭나기 위한 고통스런 허물 벗기의 마지막 단계임을 알고 더 큰 전진을 위해 조금만 더 참아주길 바란다.

1등하고도 가벼이 헤죽거리지 않고 묵직하고 도도했던 그 때 그 친구들의 모습을 1등한 우리의 대통령에게서도 보고 싶다. 때론 침묵이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도 백 배 천 배의 위력을 보일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지 싶다. 대통령이 아무리 교만을 경계하고 겸손을 강조한들 어쩌면 지금은 그런 말조차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엄중한 시기이기에 대통령의 진심이 결코 제대로 전달될 지도 의문이다.

부디 당부컨대, 열린 우리당은 무리하면서까지 한나라당에게 더 이상 구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 될 성 싶지도 않은 분위기 속에서 괜스레 헌재 판결을 피해 나가려는 편법(?)을 동원하려고도 말고 다수 국민의 뜻을 헤아리고 역사와 국민을 믿고 당당하게 처신할 일이다. 국정의 공백이 못내 마음 쓰이겠지만 대통령은 아직은 청와대로 사람들을 불러 들이지 말았으면 한다. 아직은, 적어도 아직은 자축하고 만찬할 때가 아니며 헌재 판결이라는 마지막 허물을 벗고서 아름다운 나비로 완전히 거듭날 때까지는 침묵이 금이다.

그저 다음 시험을 예비할 뿐인 1등 한 자의 진중한 표정으로 우리당 정의자이든 한나라당 박대표이든 그 누구도 대통령의 속내를 알 수 없도록 표정을 단속함으로써 전전긍긍케 하고 하고픈 모든 말일랑 헌재 판결 후 대국민 성명서에서 간결하고 강렬하게 국민들에게 천명하면 된다.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의 그런 묵직함을 너무도 간절히 보고 싶어한다. 이윽고 때가 이르면 말로서가 아닌 행동으로서 그간 대통령을 조롱해온 모든 이들에게 경외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멋진 한 방의 홀인 원을 보여주길 충심으로 기대한다.

===東山高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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