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 이야기



앵두 이야기
작성일:2008.08.08




♬ 앵두나무 처녀 ㅡ 김정애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 났네
물동이 호맷자루 나도 몰라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어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석유 등잔 사랑방에 동네 총각 맥 풀렸네
올 가을 풍년가에 장가들려 하였건만
신부감이 서울로 도망갔대니
복돌이도 삼룡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서울이란 요술쟁이 찾아갈 곳 못 되더라
새빨간 그 입술에 웃음 파는 에레나야
헛고생을 말고서 고향에 가자
달래주는 복돌이에 이쁜이는 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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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첫 번째 이야기





6살 때쯤인가 보다.
앵두 살던 집은 안방 뒷문턱 너머로 정지간 부뚜막이 맞닿아 있었다.
때마침 어무이는 부뚜막 구공탄 위로
수제비 삶을 솥단지를 올려놓으셨던 참이다.
앵두랑 안방 뒷문턱에서 밀고 당기고 놀던 꼬치 동무가
그만 앵두를 밀어버렸다.
앵두가 돌을 무사히 넘긴 뒤에도 삼신 할매는 앵두의 곁에 머무셨던 탓일까.
앵두는 펄펄 끓는 솥단지에 팔꿈치만 빠뜨리는
천우신조의 음덕[蔭德]을 입었다.
얼굴을 빠뜨렸음 어쨌을까. 참 아찔한 기억이다.
어무이는 된장 바르라는 이웃 아낙들의 민간 처방을 마다하고
동네에서 멀잖은 한 카톨릭 재단의 병원으로 데리고 가셨단다.
없이 살던 빈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어눌하게 전해지던 민간 처방 대신
개화된 처방과 치료를 선택하신 어무이 탓에 앵두의 팔은 건재하다.
그러나 그 후로 앵두는 물을 싫어하게 되었다. 특히 끓는 물을...........하~~
끓는 물에 대한 공포심과는 별도로
어린 마음에 흉터를 드러내는 게 창피스러워
옷을 벗는 목욕탕이나 수영장, 해수욕장을 멀리 두는 어린 날을 보냈던 것 같다.
그 탓에 앵두는 수영과는 거리가 멀다. 여적지 물에선 맥주병이다.
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앵두가
요즘은 강이나 저수지를 찾아 낚시대를 드리우는 날이 잦다.
펄펄 끓는 강물이나 저수지는 없으리라 굳게 믿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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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두 번째 이야기





초등학교 입학 전 해쯤이었나 보다.
앵두 살던 집 저만큼 위에 언덕 경사 따라 지어진 이층집이 있었다.
언덕 위쪽에서 내려 보면 1층집이고 언덕 아래서 올려 보면 2층집이었다.
1층이 만화방이었고 후덕했던 집주인은
2층 옥상을 동네 개구쟁이들이 자유로이 놀 수 있도록 열어 놓았다.
앵두와 동무들이 심심찮게 연 날리며 놀던 곳이다.
연날리기의 가장 주된 관건이라 하면 적당한 바람의 도움일 테고
그 다음은 연의 각 기관(살대와 귀, 꼬리, 목줄)들 간의 균형 잡힌 조합일 게다.
겉보기엔 꽤 괜찮아 보이는 연일지라도 막상 띄워 놓고 보면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 하는 때가 있다.
그 날 그랬다.
앵두가 고사리 손으로 기껏 띄워 올린 연이 맴맴거렸다.
다급한 마음에 앵두는 뒷걸음질 치며
‘바람난 연’(?)을 달래려 무던히도 애를 썼던 것 같다.
아뿔싸, 다 고만고만한 산동네 집들의 옥상이 넓어봐야 얼마나 된다꼬....
부지불식간에 앵두는 옥상 난간 너머로 하얀 연이 되어 날고 있었다.
앵두의 깊은 잠재의식 속의 기억을 깨워보면
그 순간의 느낌과 기분, 아스라하다.
천길 나락으로 꺼져가는 무념무상 상태의 아늑하고 평화로운 비상 !
그 날 앵두는 참 예뻤던(?) 작은 앞니 두 개를
그 2층집과 맞닿은 이웃집 담장 벽돌 하나와 맞바꾸었다.
물론 그 다음 일은 모른다.
삼신 할매 돌보아 주신 덕에 죽진 않았지만 기절했으니까........하~~
세월 한참 지나 들으니 당시에 앵두의 추락 소식을 듣고 달려오신 어무이도
그 아찔한 광경을 맞닥뜨리시곤 함께 기절하셨단다.
그처럼 앵두는 이미 어려서부터 간간히
‘깍꿍 !’하면서 불시에 남들을 놀래키는 재주가 비상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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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세 번째 이야기





앵두 나이 13살, 중학교 입학식 날이었나 보다.
입학식 날 비바람이 몹시도 드세었다.
약간은 헐거워도 까만 새교복에 흰 테 두른 창모 누르니
대가리 여문 새끼 제비가 비상을 준비하는 첫걸음 같았을 터.

입학식을 마치고 아부지 따로 앵두 따로 우산을 받쳐 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집으로 향했다.
주도로를 건너 앵두가 사는 동네 어귀로 이어지는 진입로에 이르러
건널목을 십여 미터 비껴선 채 무단횡단을 하고 말았다.
비바람을 피하려는 맘이 급했었나 보다. 아부지도 앵두도...
우에서 좌로 거세게 불어대는 비바람을 막느라
우산 머리가 우측방으로 넘어가 있던 터라
우측에서 달려오는 차량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위험천만한 무단횡단이 아닐 수 없었다.

퍼~억 !......................투~둑 !

앵두는 5년여 만에 다시 하얀 연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그 순간의 느낌, 기분 ?
연 날리다 추락하여 하늘을 날던 그 때의 그런 아득함, 무념무상..................
간만에 다시 한 번 느껴보는 그 짜릿함(?)이라니!
창졸간의 사태에 기겁하셨을
아부지와 택시 기사가 괜찮냐며 온 몸을 더듬는다.
작은 몸이라 족히 오륙 미터는 튕겨서 날아간 앵두는
뛰는 가슴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큰 죄나 지은 듯 손사래쳤다.
“괜찮심미더. 아부지, 괜찮아예”
그런 경황 중에도 앵두는
새로 산 가방과 우산만큼은 알뜰살뜰 잘 챙겨 들었다.
그러고선 파들파들 떨고 있는 뼈와 살을 다독이며
집까지 또박또박 잘 걸어갔다.
그날 저녁, 아부지는 ‘아 잡을 뻔 했다’는
어무이의 노기서린 쓴소리를 묵묵히 감내하셔야만 했다.
자식이 차에 치인 순간에도
택시 기사에게 모진 언사 한 마디 내뱉지 못할 만큼
순하디 순하셨던 아부지는 지금은 안 계신다.
앵두가 십오척 하얀 담장 안에 살 때조차
대학원 다니노라며 둘러대는 나머지 가족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주실 만큼 그리도 무던하고 순박하시던 분이셨다.
아부지는 지금도 가끔
앵두의 눈가에 머물다 앵두의 눈시울을 적셔놓고 가신다.

삼신 할매는 그렇게 또 한 번
앵두의 중학교 입학식 날에도 함께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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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네 번째 이야기





고등학교 시절엔 퍽이나 얌전했다. 새색시처럼.
앵두가 살아온 날들 중에선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지나는 길에 어쩌다가 초등학교 지지바 동창들이라도 마주칠 때면
남녀칠세부동석의 절대 금기라도 어긴 양
애써 눈길 돌려 옆걸음질 치면서도 살풋살풋 곁눈질하던
여느 사춘기 청소년들과 다를 바 없었던 풋풋한 날들이었다.
하, 얼마나 아름답고 청순했던 날들이었던가~~
지금에도 그런 순박함이 가슴 어디엔가 저장되어 있을래나~~
이 시절만큼은 삼신 할매도 앵두를 잠시 잊고 사셨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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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다섯 번째 이야기





군 입대를 위해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놀면 뭐하노,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 하는 맘으로 전봇대를 훑고 다녔다.
“여보세요, 광고 보고 전화 드리는 건데예....”

결국 하나 건졌다. 일단 와보란다.
“덩치가 이래가 되겠나~딴 데 가서 알아보거래이”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시키만 주보이소, 열심히 해보께예”
매달리다시피 하는 앵두의 열의가 현장 소장 보기에 가상했었나 보다.
“학생 열성을 봐서 한 번 써보긴 한다만 얼마나 버틸런지....”

첫 출근을 했다.
한 초등학교의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는 공사였다.
어렵쇼, **초등학교라니 !
분교하여 전학하기 전까지 초등 1, 2학년을 다녔던 내겐
또 하나의 초등학교 모교가 아니던가.
여름 날 폭우 때면 교실에 물 넘쳐나든 그 곳 !

앵두가 크면서 언제 삽질이나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있었던가.
건축 현장 잡부, 일명 ‘디모도’! 초짜들에겐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난생 첨 해보는 노미질에 들짐질에 상차, 하차 삽질에...
이튿날 아침, 앵두의 곱디고운 손은 통통 붓고 오그라들어 펴지질 않는다.
그래, 기여븐 우리 후배들, 냄새 안 나는 곳에서 이뿌게 똥 누일 거라는데
선배로서 예서 말 수는 없다는 오기로(사실은 하루나 버틸까 싶어 하던
현장 소장의 의심스런 눈초리에 대한 오기와 자존심으로)
죽을똥 살똥 모르고 하루하루를 넘기다 보니 어느덧 보름여.

당시, 인부들 중에서
유난히도 앵두를 좋아하던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한 분 계셨다.
작업에 서툰 앵두에게 요모조모 잘 챙겨주시던 분이었다.
일 끝나면 하루도 걸르잖고 포장마차를 찾을 만큼 술을 좋아하셨던 분이다.
공사기간 내내 앵두는 그 분과 술벗(?)이 되었다.
건축 현장 잡부일이란 게 몹시도 육신을 고단케 하는 막일인지라
현장 인부들에게 술은 지친 육신을 달래는 피로회복제임과 동시에
일상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일종의 값싼 마약과도 같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전 날 밤, 아저씨와 함께 여느 날과 달리 제법 많이 마신 듯했다.
다음날 아침, 머리는 지끈둥하고 어질어질하기가 그지없다.
술기가 채 가시지도 않았건만 아침해는 어김없이 떠올랐고
앵두는 갈지자 걸음을 재촉하여 **초등학교 똥간으로 가야만 했다.
당일 오전 앵두에게 맡겨진 일은 시멘트 포대를
건너편 교사(校舍) 옥상 물탱크까지 나르는 일이었다.
들통에 시멘트를 지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4층에 오를 때까진 까짓것이었다.
드디어 옥상, 탁 트인 고공이 열리는 그 순간, 흐미야 !
가까스로 억제시키고 있던 술기가 핑글핑글 돈다.
하늘은 맑고 푸르고 옥상 바람은 선선하니 무릉이 어드메뇨,
~~에혀라 디여, 돈다 돌어~~~

물탱크는 말 그대로 옥상옥이다.
옥상옥인 물탱크 꼭대기까지 구멍 숭숭 뚫린 가로방 하나가
측면 버팀대도 없이 경사지게 놓여 있을 뿐이다.
‘저기 위에까지 올려야 하는데.....’
“*군아, 뭐하노 ! 쎄멘 빨리 안올리끼가 !!”
‘그래, 설마 죽기야 하것나......’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두 걸음만 더 디디면 된다...앵두야 정신 챙기거래이....
스스로 다독여 가면서 사선을 넘는 전사의 심정으로 마침내 마지막 한 발...
아아아, 고지가 바로 저긴데.......

또 한 번 삼신 할매는 하얀 연이 되어 날아가려던 앵두를 살렸다.
뭐 하긴 운동장으로 날아갈 만한 위치는 아니었으니 죽기야 했겠냐만
어쨌거나 좋쟎은 상황을 맞을 뻔한 순간에 앵두는 물탱크에 매달렸고
세멘 부대는 ‘퍽’ 소리와 함께 옥상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저 건너편 교사 4층에서 공부하고 있던 앵두의 후배들이 창가에 달라붙어서
타잔 놀이를 하는 앵두를 재미난 듯이(걱정스레?) 바라보고 난리다.
며칠 전 운동장에 쌓인 스티로폼 위에 누워 쉬는 참에
“노가다 아저씨 봐라”며 깔깔 거리던 애들에게 점잖게
“이 늠들, 엄마 아빠 말 안 듣고 공부 안하면
커서 아이씨처럼 ‘노가다’ 된대이~~”라며 큰소리 쳤던 노가다 앵두는
그 날 후배들 보는 앞에서 옥상 물탱크에 매달린 채
스타일 완전히 꾸기삐릿대이, 삐레이 삐레이~~

그 일이 있은 뒤에도 앵두는 단 한 차례의 결근도 없이 한 달 보름여만에
마침내 후배들의 똥간 수리 공사를 완수하였다.
현장 소장으로부터 계속 같이 일해보자는
스카웃(?)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앵두는 보무도 당당하게
알 수 없는 또 다른 성장의 몸살을 앓기 위해 표표히 길을 떠났다.

참, 또 한 번 앵두를 구해 주신 삼신 할매께는 다시 한 번 인사 드려야겠다.
“삼신 할매, 참말로 고맙습니데이~사랑합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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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여섯 번째 이야기



서울 동부지역대학연합 박종철 추도 집회(1987.1.24 고려대)



복학생 앵두는 아무래도 남녘 머스마로서의 기개와 자존심을
내팽개칠 순 없었나 보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하루가 멀다 않고 어깨를 건 전열은 꾸려졌었고
매번 앵두는 뒤에 서질 못하고 최전방이었다.
빨간색 메가폰은 언제나 앵두의 손에 들려 있었고,
독기 서린 전경들의 최루탄은 빨간색 표적물을 겨냥할 때가 많았다.
동족상잔의 6.25가 끝난 지가 언제인데 캠퍼스의 정문을 사이에 두고
나가려는 자들과 막는 자들 간의 전쟁은 일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군사 독재 정권 말기 대한민국 서울 지역의 대학가 자화상이 그랬다.

그 날도 최루 연기는 자욱했고
앵두의 손에 들려있던 빨간색 메가폰에선 사자후(?)가 토해지고 있었다.
희뿌연 최루 연기 탓에 눈물과 콧물과 땀이 뒤범벅이 된 채로
잠시 긴장을 늦추었던 순간,
정문 측면에 빼곡히 들어선 나무숲 사이에서
뭔가 시커먼 덩어리 하나가 날아든다.
어엇~이건, 열 추적 미사일급이로세! 우이 싯퐁 !!
사과탄쯤이야 재기를 차드끼 하고
빗발치던 최루탄도 훌라우프 다루드끼 요리조리 허리 살짝 돌려 피하던
역전의 싸움꾼 앵두가 숲속에서 불시에 날아든
열 추적 미사일급 최루탄 앞에서만큼은 속수무책, 일순 굳어버렸다.
그 순간의 느낌, 기분 ?
이 또한 앞서 말한 몇 번의 그런 느낌, 기분 그대로였다.
연 날리다 옥상에서 추락하고 차에 치어 하늘을 날던 그런 아득함, 무념무상....
앵두가 기껏 할 수 있는 동작이라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 순간, 삼신 할매는 또 한 번 앵두를 돌보셨나 보다.
고개를 돌림으로써 정면 타격은 피했다.
허나 눈가에서 터져버린 최루탄에
이미 얼굴은 희뿌연 최루가루 범벅이었고 왼쪽 눈을 뜰 수조차 없다.
안경이 없다. 눈이 따갑다. 최루가스에 따가운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왼쪽 눈가를 만져보니 손에는 선홍빛 피가 묻어난다.
아, 이런, 아뿔싸, 제기럴~~아무 생각이 없다.
실명, 실명, 실명, 실명, 실명.................
텅 빈 듯한 머릿속에선 도리를 쳐도 온갖 회한이 끊임없이 밀려든다.

수배 중이었던 앵두는 걸어서는 학교밖으로 나설 수가 없었기에
한 은사(모두가 몸을 사리던 그 시절치곤 참 괜찮았던)의
승용차 뒤트렁크에 몸을 숨겨 긴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훗날, 그 은사는 기꺼이 앵두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 축복해 주셨다.)
눈꺼풀 안팎으로 박힌 안경유리 조각을 제거하던 의사가
천만다행히도 각막이나 동공 쪽으론 손상이 없으며
외상의 정도도 그리 심하진 않단다.
의사의 그 한 마디, 앵두에겐 그야말로 천상에서 내리는 복음이 따로 없었다.
그 날, 그 의사와 간호사들은 내내 울면서 앵두를 치료했다.
암울한 시국과 앵두의 몰골이 처연해 보여서가 아니라
앵두의 몸에 범벅된 최루가스 내음을 종내 참아내질 못하고서...... ㅎ~~

달리는 차 뒤트렁크 속에서 칠흑처럼 암울했던 이삼십여 분 남짓의 순간은
앵두가 되돌아보는 오래된 기억들 중에서 절망과 체념의 감정이 어떤 지를
난생 처음 제대로 느끼게 해준 정말 진저리쳐지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앵두의 양쪽 눈은 역시 건재하다.
검정색 안경테가 그저 금장으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삼신 할매, 또 한 번 살려주셔서 억수로 고맙습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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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일곱 번째 이야기(제1편)






어느 해 뜨거운 여름.
앵두와 벗들은 서해상의 아주 작고 예쁜 섬을 찾았다. 호도!
앵두가 위장 취업해 있던 사업장의 3인의 벗들과 함께 MT를 겸한 여름휴가 !
당시 앵두는 대학 4학년 제적 상태로 노동운동으로 전선을 옮겨
선반(배가 아니고 쇠를 깎는 기계를 ‘선반’이라 한다)노동자로
3년여 이상을 공장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앵두 나이 서른 고개를 막 넘어갈 즈음이었었나 보다.

시원한 바람, 백설처럼 희고 깨끗한 모래,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연중 내내 잔업에, 철야에, 특근에 지친 우리들에겐
별천지가 바로 여기다 싶은 그런 아름다운 섬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부푼 가슴들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욱 늘어져버린 건
꿈같은 해변의 첫날밤을 하얗게 지새운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휴가 이틀 째 되던 그 날 정오를 갓 넘긴 시각,
한 무리의 앳된 남녀 학생들이 몰려왔다.
우리가 터 잡은 지척에서 새 둥지를 짓느라 주위가 사뭇 산만해졌다.
허나, 한창 발랄해야할 나이대의 아이들치곤 그다지 소란스럽지 않은 품새였다.
고교 1,2년생 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 서넛, 여학생 서넛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천 시내에 적을 둔 학생들이었다.
우선 겉보기는 날티 나지 않고 대체로 순진하고 착한 아이들로 보였다.
한 동안 둥지를 짓고 짐을 풀고 부산을 떨더니 시간이 좀 흐른 후에
학생들의 리더격인 듯 참 잘 생기고 나름 카리스마도 있어 보이는
남학생 하나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세련되고 정중한 어투와 몸가짐으로
우리에게 부탁 하나 들어 주십사 한다.

사연인즉슨, 섬에 내려 백사장으로 오는 길목에서
몇 해 전 퇴학당한 학교 선배를 맞닥뜨렸는데
해 지면 방문할 터이니 주안상 차려 놓고
맞을 준비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단다.
그 선배란 녀석, 섬 토박이로 평소에도 대천 시내를 오가며
시내에서도 꽤나 알려진 왈패였던 모양이었다.
리더 학생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여학생들의 안위가 많이 걱정스러웠던지
나름대로 고민 끝에 처음 보는 이웃집(?) 형님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이다.
왠지 도착하면서부터 나이들에 걸맞지 않은 침중한 분위기더라니
우리들 있는 곳 지척에 둥지를 틀었던 나름의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선배가 나타나면 여학생들 중의 한 명을
사촌 동생이라고 둘러대어 여학생들을 좀 돌봐 주십사며 시나리오까지
지가 다 짜주는 걸 보니 참 총명하고 침착해 보이는 학생이다 싶었다.
자신의 공주들을 지키겠노라는 그 앳된 학생의 기사도 정신을
천하의 위풍당당 노동자들인 우리가 어찌 내몰라라 할 수가 있었겠는가.
‘오냐, 알았다. 이 형님들이 너와 너희의 공주들을 지켜주마.’
그런 거침없던 호기가 일말의 긴장감 속에 쭈글스럽게 변모한 것은
그로부터 채 두어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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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일곱 번째 이야기(제2편)





해질 무렵 석양을 옆으로 삐딱하게 받으며 나타난 황야의 무법자들!
어렵쇼, 이 무슨 예상치도 못한 그림인가.
분명 총 찬 놈도 아니고 칼 두른 놈도 아닌데
우리는 일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시퐁~ 이거 한 두 놈이 아니잖아 !
카리스마 학생의 입에서 떼거리로 몰려올 거란 얘긴 없었는디 ???
김두한 같은 덩치 하나, 시라소니 같이 날렵해 보이는 녀석 하나, 등등......
제법 힘깨나 쓰고 깡도 있어 보이는 너 댓 명의 졸개들이
학익진의 대형으로 백사장에 회백의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등장하는 본새가
슬로우 모드 영상과 배경 음악만 곁들일라치면 영락없는 영화의 한 장면이다.
짜식들, 폼생폼사하는 양아치들 아니랄까봐....
그 범상치 않은 예기 앞에서 우리로선 여간 긴장치 않을 수 없었다.
이거 괜한 일에 끼어 낭패 보게 생겼다는 우려 반,
그래도 정의의 칼을 높이 들어야 하리라는 호기 반.......
앞서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적(?)들과 첫 대면한 그 짧은 순간의 심란함이라니 !
풉, 위기의 순간에 샘솟는 존재의 얄팍함이여, 생존본능이여 !
빗발치던 최루탄과 지랄탄, 사과탄의 연막 속에서 백골단과 맞서 싸우던
그 숱한 전장에서의 용맹과 기개는 다 어디로 가고
섬나라 어린 오랑캐 몇 명의 위세 앞에서
찰나간의 비겁함이 살짝 돋는 순간이었다.
너나없이 비슷한 심정이었을 우리는
이내 흐트러지는 정신을 다잡고 사태의 수습을 꾀했다.
우선, 공주들을 우리의 진중으로 대피시키고 적들의 동태를 살폈다.
이윽고 남학생들만 남아 있던 전초 기지에 도착한 녀석들이
파죽지세의 기세로 남학생들을 압도하며 희롱하는 동안
그 적장 또한 거침없는 기세로
우리가 포진한 본영을 넘보며 슬금슬금 다가서는 게 아닌가.
스물 한 둘이나 먹었을까. 나이도 어린놈이 위, 아래도 없는 양
게슴츠레한 족제비눈을 이리 저리 굴리고 째는 폼이 딱 양아치 행상머리다.
오늘 여학생들과 함께 좀 놀아야겠으니 협조 좀 해달란다.
협박 반, 회유 반의 언동이 어디서 제법 많이 놀아 본 듯
은근슬쩍 시비를 붙여오는 게 오늘 일 한 번 치르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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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일곱 번째 이야기(제3편)





글을 잠시 돌려 앵두 편 장수들의 면면을 한번 살펴보자.
노조 없는 척박한 사업장에
노조 깃발 한 번 올려보자며 의기투합하여 도원결의를 하고
그 대장정에 나서기 전 투지와 결의를 불태우기 위해 이 작은 섬으로
MT겸 휴가 길에 나섰던 우리의 장수들은
체형으로 보나 평소 성정을 보더래도 앵두를 제외한 3인은
영락없는 현덕 유비, 운장 관우, 익덕 장비의 풍모와 기개를 가진
천하의 명장들이었다.
사실, 앵두 하나 빼고는 우리 측 장수들은 오랜 노동으로 다져진 강골들로서
인상에서나 덩치에서나 적들에 비해 결코 전력이 뒤진다 할 수는 없었다.
누가 뭐래도 그 일촉즉발 위기의 순간에서
우리가 가장 믿고 기대하던 장수는 역시 운장이었다.
중, 고교 다니던 소시 적에 좀 놀았노라는 평소의 허세도 있었던 데다
그를 증명키라도 하듯 무짝만한 상박에는
큐피트의 화살이 하트를 관통하는 먹빛 문양이 당당히(?) 아로새겨져 있었다.
지금에사 돌아보면 앵두가 하얀 담장 안에 살면서 흔히 보던
조폭들의 등짝에서 꿈틀대는 용 문신이나 호랑이 문신에 비하면
그건 유치원생 수준의 조잡한 낙서일 뿐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들의 영웅 관운장은 그 바쁜 공장생활 중에도
헬스클럽을 오가며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다져온 몸매만을 놓고 보면
우리들 중에선 단연 군계일학이었고 기대를 한 몸에 받기에 손색없었다.
우리들의 최고 떡대에 대한 나머지 3인의 한량없는 믿음과 기대는
그 오고가는 눈빛들 속에서 충분히 교감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운장의 존재는 우리에겐 스멀스멀 기어드는
일말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자신감의 원천이었던 셈이다.

‘저, 위 아래도 없는 치기와 객기로
우리들의 어린 백성들을 위협하며 핍박하고 있는
섬나라 오랑캐들을 어떻게 무찔러야 하나...
일단 한 덩빨 하는 관운장의 청룡 언월도를 앞세워
순식간에 적장의 수급을 베게 한 다음
장비로 하여금 좌, 우익에 포진한 적졸들을 장팔사모로 휘저은 연후에
혼비백산한 적들의 후방을 나와 유비가 협공하면 그나마 승산이 있지 않을까....’

전경들과 맞붙는 기술과 작전이라면 모를까
양아치들과 맨 몸으로 맞장 뜨는 동네 싸움박질엔 도통 대책이 안서는 지라
머릿속은 들녘 바람에 뒹구는 낙엽처럼 어수선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바로 그 때였다. 우리의 희망, 관운장이 일순 침묵을 깨고 나서는 것이었다.
비슷한 심정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을
익덕 장비와 현덕 유비 그리고 앵두는
일순, 아 ~ 드디어 우리의 떡대, 우리의 희망, 우리의 운장 관우가
그 소시 적의 끼를 발산하여 청룡언월도를 높이 들고 단숨에 적토마를 내달려
이 난국을 일거에 잠재우려나보다며 들뜨고 기대서린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 그러나 그토록 우리의 믿음과 기대를 한 몸에 모으며
우리들의 가장 든든한 빽이자
자신감의 원천이던 운장이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천둥 같은 일갈을 뱉어내기는커녕
다 기어들어가는 모기 소리로 쪼질쪼질 내어 뱉는 말,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아뿔싸, 이를 어쩔꼬, 하필 이런 긴박한 순간에
이 무슨 날벼락 같은 뒤통수 후리기인가.
우리 전력의 50%를 뒷간에다 꼬불쳐 두어야 한다니, 오호 애재라 !
그 때까지만 해도 맥주 먹고 마려운 오줌 참아가며 전장을 지키던
나머지 3인의 장수는 '설마 '하는 상념을 토닥토닥 달래며 애써 자위하고 있었다.
‘아하, 절정의 고수는 부양신공의 초식을 전개함에 앞서
밑으로는 물갈이를 하여 몸을 가벼이 하려나 보다’ 하고 말이다.
허나, 그 일말의 기대마저 허무하게 깨어진 건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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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일곱 번째 이야기(제4편)





쌈박질을 나이로 한다면야 단연 승리는 우리의 것이건만
운장도 없는 터에 예닐곱의 어린 양들을
한 무리의 늑대들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
그 순간에 앵두의 뇌리를 문득 스쳐가는 게 있었다.
손자의 삼십육계 중 제 칠계 무중생유(無中生有) !

‘한 여름 밤 백사장 혈투를 벌인들 남을 건 없다.
애들이 어떤 지경에 처할지도 알 수 없다.
전세로 보아도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우리가 우세한 건 단지 나이 뿐이다.
그래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건 회유가 최선이다.
회유를 가능케 하는 건 바로 무중생유의 뻥튀기이다.’

앞뒤 따지고 생각할 겨를도 없는 긴박한 순간이라
차분히 정리된 생각이라기 보단 본능적으로 스쳐 지나는 느낌일 뿐이었다.
제법 인상 구기며 시비조로 나서던 예의 그 선배란 녀석에게
앵두가 적당한 언변을 곁들이며 대뜸 술을 한 잔 건넸다.
술잔이 거부되었으면 다음 수순이 참 난감했을 터였다.
그 녀석 애주가였거나 권하는 술은 마다진 않는다는
나름의 술 철학이라도 있었던 건지
어정쩡한 자세로 술잔을 받아들고는 쭈욱 들이켰다.
녀석이 잔을 되건네며 술을 따르려는 순간,
기회는 이 때다 싶어 말투를 자네 투로 바꾸며
빈 잔을 내리고 옆에 있던 대접만한 코펠통을 내밀었다.
“자네, 여기다가 따라 보게나 ~” 크~, 이 무슨 엉뚱한 객기려니!
두세 잔 빠지고 남은 소주 한 병을 거의 다 따르다시피한 대접을 들어
막걸리 마시듯 쭈욱 들이켰다.
누가 봐도 참으로 시원하고 깔끔한 원샷이었다.
일순 녀석의 얼굴에서 당황스런 기색이 살짝 스쳐 지나는가 싶더니
다시 따라 건네준 지 잔을 마시는 둥 마는 둥 했다.
시비조로 으름장을 놓던 초장의 기세가 한 풀 꺾인 듯 보였다.
그 순간을 놓칠 새라 숨 쉬고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회유에 돌입했다.
“사촌 여동생이 있으니 따로 놀게 할 순 없고,
자네들하고 저기 남학생들 다 이리로 와서 우리랑 같이 놀도록 하면 어떤가 ?”
“.....................................”
잠시간 할 말을 잃었던 녀석이
벌레 씹은 듯 마지못한 표정으로 그러겠노라고 한다.
어이쿠, 그 제안이 그리 쉬 통할 줄이야. 적장의 반응은 기대치 이상이었다.
건너편 남학생들과 적졸들에게도 상황을 알렸더니
잔뜩 긴장해 있던 애들은
그제야 안도하는 눈빛 가득하고 입가엔 웃음이 돌았다.
팽팽히 맞서던 긴장은 쌍방 간의 긴급 협상 타결로
단박에 해빙의 무드로 전환되었다.

바로 이때 쯤 해서야 비로소 화장실 갔다오마던 운장이 슬금거리며 나타났다.
평소 같잖게 그의 큰 덩치는 어딘지 모르게 약간은 왜소해 보였고
그의 앵두빛처럼 발그레해진 얼굴을 마주 대하는 그 떱떨함이란, 맙소사 !
한갓진 섬에 떡 하니 번듯한 명패를 달고 있을 만한 화장실이 어데 있다꼬
똬리 틀고 앉으면 거기가 바로 해우소인 것을!
청룡 언월도를 높이 들어 적장의 수급을 베어주길 기대했더니
운장과 그의 적토마는 작은 섬 어딘가에 있을 번듯한 화장실을 찾아
얼마나 내달리고 내달렸길래 이제서야 돌아온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위기를 넘기고 가슴을 쓸어내린 남은 3인의 장수들로서는
우리들의 얼치기 기대주 운장을 정말 패쥑이삐고 싶은 순간이었다.... 크~~
운장은 그 후, 휴가를 끝내고 사업장에 복귀한 뒤에도
어쩌다 휴가 때의 회고담이라도 나올 때면
꿀 먹은 벙어리인양 잠시간의 침묵을 지키곤 했다, 풉.

앉아서 박수로 추임새만 넣으려는데
학생들이 애써 잡아끄는 손길을 차마 뿌리치진 못하고서
앵두와 벗들은 어린 남녀 학생들과 섬나라 오랑캐들과 한데 어울려야만 했다.
달빛 반사된 백사장 은백의 무대 위에서 벌어진 한 판 디스코 춤사위 속에
우리들의 휴가 둘째 날 일정은
뒤죽박죽된 채로 한 여름 날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섬나라 오랑캐들과는 이미 ‘형님 한 잔’, ‘아우 한 잔’ 하는 중이었고,
오가는 술잔 속에 초장의 험악하던 살풍경은
온 데 간 데 없이 녹아버린 지 오래였다.
고향 선후배가 간만에 해후하여
정담을 나누는 자리였다 해도 그처럼 흥겨웠을까.
은백의 백사장을 무대로 앳된 남녀 학생 6~7명, 섬나라 오랑캐 5~6명,
공장노동자 4인이 어우러진 디스코 파티라니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부자연스런 조화'는
바로 손자의 삼십육계 중 제 7계 ‘무중생유’가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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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일곱 번째 이야기(마지막편)





근데 이를 어쩔꼬, 전혀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분위기는 이제 크게 우려치 않아도 될 성싶어
꼬옥 조여 매었던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앵두의 눈에 비친 하늘의 별들이 마치 뽑기판의 숫자들처럼 빙글 빙글 돌았다.
젠장, 무중생유인지 뭔지 객기를 부리느라 코펠 대접으로 원샷 했던 소주가
두어 시간 쯤 지나면서 결국 그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속은 미식거리고 머리도 아프고 어지러운 게 영 죽을 맛이었다. 쉬고 싶었다.
이 요란스런 판을 벗어나 어디 조용하고 시원한 곳을 찾아 마냥 쉬고 싶었다.
슬며시 판을 벗어나 비척대면서 어둠내린 백사장을 헤매던 끝에
앵두가 닻을 내린 곳은
파도의 꼬리가 닿고 돌아서는 백사장 끝자락 어디쯤이었다.
참 시원하단 느낌 속에 두 다리 좌악 펴고 등짝을 깔았더니
무릉이 여긴가 싶었다.
내 오늘 저 하늘의 별들을 남김없이 다 세어 보리라!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별 넷 나 넷, 별 다섯 나 다섯.........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꿈결인 듯 누군가 다급히 깨운다.
화들짝 일어나 보니 바닷물이 거의 종아리를 타고
무릎 녘까지 적셔오는 중이었다.
이런 제길, 밀물이 시작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앵두를 깨운 건 장비였다. 현덕과 운장은 다른 곳을 찾아다니는 중이라 했다.
한참을 찾아 다녔단다. 그들이 그 순간에 앵두를 찾지 못했으면
아마 영원히 찾지 못할 수도 있었을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앵두가 물을 얼매나 무서워하는지 알고 계신 삼신 할매는
또 한 번 그렇게 익덕으로 하여금
적시에 앵두를 찾아 깨워 앵두를 지켜주셨다.......하~~

휴가 일정 마지막 날인 다음 날 아침, 학생들과 함께 짐을 꾸렸다.
학생들도 원래 일정은 하루 더 머물 요량이었나 본데
우리가 떠난다니 더 이상 그 곳에 머물 엄두를 못 내고 우리를 따라 나섰다.
섬을 떠날 때 간 밤에 호형호제하며 동맹을 맺은
섬나라 오랑캐들(?)이 배웅하러 나왔다.
엊저녁 처음 조우했을 때 잔뜩 경계했던 첫인상과는 달리
그리 막돼먹은 천둥벌거숭이들은 아닌 듯했다.
꼭 다시 한 번 오라는 녀석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한 여름날 밤의 꿈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몇 주 뒤, 앵두와 벗들은 작고 예쁜 편지 한 통을 받아 들었다.
“**, **, **, **오빠께.”로 시작되는.....
유난히도 살갑고 똘똘해 보이던 한 여학생이 써 보낸 감사의 편지였다.
그 기괴(?)했던 ‘한 여름 밤의 꿈’이 되살아나기라도 하는 듯
편지를 둘러싼 4인의 노동자들의 기름때 절은 얼굴엔
환한 미소가 그윽히 번져나고 있었다.

또 한 번 앵두를 물에서 건져주신 삼신 할매, 고맙습니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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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여덟 번째 이야기(제1편)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던지 뒤집어썼던 군용 모포가 흥건하다.

앵두는 남산의 음습한 지하실에서 그렇게 나흘째 아침을 맞았다.

나흘 전 해질 무렵, 앵두의 오피스텔 사무실로 들이닥친
7~8명의 안기부 요원들에 의해 어딘 지도 모를 곳으로 끌려갔다.
눈이 가려진 채 승용차로 이동하는 이십 여분 남짓의 그 순간은
과거 학창시절 최루탄을 눈가에 맞고 은사의 승용차 뒷트렁크에 실려 가던
그때와 흡사한 어둠 속 절망과 공포를 다시금 되살리고 있었다.
아니, 상황만을 놓고 보면 그 때보다 훨씬 더 암울하고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언젠간 닥치리라 각오했던 모든 것들이 이젠 냉혹한 현실이 되었고
앞으로 앵두가 겪게 될 이 알 수 없는 몸살들은
오직 시간만이 약일뿐이란 걸 뼈저리게 각오해야만 했다.
성장의 몸살이 될런지 쇠락의 몸살이 될런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랬다, 앵두가 끌려갔던 곳은 과거 박정희나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만 해도
병신 되지 않고 나오면 다행이라던 그 악명 높던 남산의 지하실이었다.
대학 시절 첫 구속 때
장안평 대공 분실의 공포와 요지경을 이미 선경험했던 터라 웬만한 공포는
이겨 낼 수 있으리라 각오했건만 이번에 마주한 상대는 확실히 달랐다.
(장안평 대공 분실은 87년 6.29 민주화 선언을 끌어내는 그 도화선이 되었던,
서울대 박종철 씨가 물고문 끝에 사망했던 남영동 대공 분실과 함께
서울 시내 도심가에 위장해 있던 대공 수사 기관이다.)

검거 직후 초동 수사에 올인한 그들의 흉폭스런 닦달 탓에
나흘을 채 넘기기도 전에 앵두는 거의 맛이 갔었나 보다.
눈꺼풀은 천근인 양하고 이리 저리 핍박받은 몰골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들이 무엇을 물었고 무엇을 답했는지 정신마저 혼미하다.
지난 사흘여 동안 꾸민 진술조서가
족히 일, 이백여 장을 훌쩍 넘었지 싶을 정도로 앵두의 과거 행적들은
‘취조’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낱낱이 발가벗겨져야만 했다.
칠팔여 명의 수사관들이 교대해 가며 두서너 시간 쪽잠을 재울 때를 빼고는
연일 앵두를 족쳐대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가 느끼는 공포가 이 같을까 ?.....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하나....
멀쩡한 몰골로 살아남을 수는 있을까....어무이가 보고 싶다.... 가족들이 그립다....
극단의 절망과 고독, 공포의 순간에서
어무이와 가족들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도 인지상정일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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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여덟 번째 이야기(제2편)





어무이의 존재 !
누구에게나 애틋함이 앞설 테지만 앵두에겐 더더욱 가슴 저미는 존재다.
졸업을 앞둔 시점, 앵두는 대학 졸업식장에서가 아닌
장안평 대공 분실에서 어무이를 뵈어야만 했다.
그 지난 1년여의 수배 기간 중에 어무이를 뵌 건 단 한 번,
그것도 길거리에서 쫓기우듯 십여 분 남짓한 만남이 전부였었다.
(앵두의 본가도 수배중인 앵두를 검거하려는 경찰이
잠복근무로 상주하다시피 했으니 가족들과 만나는 건
그야말로 대단한 각오 없인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원래 면회가 안되는 곳이건만
'어머니'란 이름이 갖는 빽은 곧 '하느님 빽'이 아니던가 !
세월 지나 들으니,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대공 분실 정문 대로변에서
내 자식 내놔라며 나뒹구신 어무이의 필사적 기세에
그들이 결국 굴복하고 말았었단다.
어무이는 앵두의 손을 부여잡고 참 많이도 우셨다.
주름진 눈가의 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피눈물처럼 여겨지던 순간이었다.
그닥 크지도 않은 눈매 속에 어쩜 그리도 많은 눈물을 담고 계셨댔는지...
박종철 고문 사망사건 직후였던지라
행여 당신의 아들도 흉한 꼴을 당했을 새라
앵두의 옷을 헤집어 들쳐가며 온 몸을 샅샅이 더듬어 살피셨다.
자식의 몸에 어디 생채기 하나라도 발견되기라도 하면
수사관들의 머리채라도 휘어잡고 늘어질 듯한 어무이의 맹렬한 기세 앞에서
내게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들이
고양이 앞의 쥐처럼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보며
앵두는 적지에서 일순간이나마 호가호위(?)했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앵두가 그 순간을 어찌 견뎌내었는지
가슴으로 운다는 게 그런 것이었으리라.
앵두는 어무이의 눈물을 쓸어 가슴 깊이 꼭꼭 다져 눌렀었다.
수사관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겠노라는 오기로
습해지는 가슴과 눈시울을 애써 다잡고는 위축감 없는 냉랭한 목소리를 이었다.
"어무이, 울지 마이소, 어무이는 죄인이 아닌 자랑스런 아들을 키우셨습니다."
돌아보면, 억장이 무너져 내렸을 어무이를 앞에 두고 펼쳐 보인
앵두의 냉담하고도 단호한 처신은 참으로 모진 대응이 아닐 수 없었다.
수사관들마저 혀를 끌끌 찰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들에겐 부모 심정 모르는 젊은 놈의 호기나 객기 정도로만 보였을 게 뻔했다.
연유야 어찌됐든 어무이께는 정말 큰 불효가 아닐 수 없었고
그것은 앵두의 인생에서 감당해 가야할 짐들 중에 첫째가는 짐이 되었다.
앵두가 어무이의 가슴에 박은 대못의 크기가 결코 작지 않건만
그렇듯 위기의 순간마다
어무이는 태산처럼 앵두의 뒤를 받치며 어루만져 주셨다.
앵두의 못된 불효는 언제나 끝이 날 지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할 텐데.......

그런 어무이를 떠올리는 것도 남산의 음습한 지하실에선 배부른 사치일 뿐
어떤 상념도 떠올릴 여유조차 없는 폭압적 취조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 야경 찬란한 남산의 숲속 산책로를 걷는 이들 중에
자신이 디딘 발아래 어딘가의 땅 밑에서
이런 살풍경이 연출되고 있으리라고 뉘라서 짐작인들 할 수 있을까....
각오는 했다만 냉혹히 전개되고 있는 현실 앞에선 그 의기양양했던 각오는
늦가을 거리에 나뒹구는 낙엽처럼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락으로 꺼져 내리는 듯한 공포 앞에서
오직 ‘절망’과 ‘가족’이란 두 개의 테마만이
앵두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게 몽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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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여덟 번째 이야기(마지막편)





나흘째 되던 그 날 새벽 쪽잠 중에 꿈을 꾸었다.
무슨 꿈인지 지금은 기억에도 없다만 아주 신나는 꿈이었던 것 같다.
깨었을 때, 앵두의 자는 모습을 감시하던 수사관의 전언에 의하면
자는 중에 미친 늠처럼 킥킥거리더란다.
아무리 꿈속에서라지만
이런 곳에서 킥킥 대고 웃을 수 있는 늠은 처음 본다는 듯
그 어이없어 하던 수사관의 표정이라니, 풉 !
그랬던 것 같다. 아주 아주 신나고 재미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지옥의 한 가운데에서.....
꿈속에서나마 보고픈 가족들과 만나 정담을 나누며 맘껏 웃었을 수도 있고
앵두의 연인을 재회하여 사랑의 밀어와 희열을 나눴을 수도 있다.
앵두의 남은 생에서
다시는 느껴보지 못할 거라 각오했던 일상의 소박한 행복들,
그런 아름다운 순간들을 꿈속에서나마 만끽했었나 보다.
앵두의 영혼은 그 아름다운 꿈속에서 한없는 자유와 행복의 나래를 펼쳤건만,
정작 앵두의 육신은 홑껍데기 군용 모포를 그리도 흥건히 적실만큼
온통 식은땀으로 반응을 하였던 것이다.
앵두는 나흘 째 되던 날에 그렇게
육신과 영혼이 따로 존재하는 영육 분리의 상태를 맞았다.
웬 종일 꿍꿍 앓았다. 밥도 넘어 가질 않는다. 몸이 불덩이다.
담당 의사가 긴급 진료를 다녀가고 약까지 먹여가면서도 취조는 계속되었다.
이 때 만큼은 삼신 할매의 구원의 손길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앵두의 곁에 한결같이 머물며 앵두를 지켜주시던 삼신 할매조차
남산 지하실의 위세 앞에선 속수무책이었었나 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란 암울한 심정으로 버티며 일주일 남짓 되던 날,
화장실에 앵두를 데려가던(자해할까봐 큰일 보는 순간까지 동행 감시한다)
수사관 중에 하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넌지시 귀띔한다.
“***씨, 이곳에서 온전히 버텨내려면
‘한 거는 했다 안한 거는 안했다’고 하세요”
피의자를 상대하며 존대하는 법이 없었던 그들이었건만
어투에서 약간의 공손함마저 묻어난다.
아, 이건 또 무슨 난데없는 친절이고 해법인가 !
앵두를 현혹하는 간교한 술책인가 ?
그의 얘기는, 거짓 진술로 ‘버텨봐야 소용없다’는 얘기임과 동시에
허위 자백을 강요하는 경우엔 ‘버텨도 살만하다’는 얘기이기도 하였으며
이미 그들은 앵두의 행적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였다.
나중에 몇 년이 흐르고 나서 지인을 통해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당시, ‘온전히 살아남을 해법’(?)을 넌지시 제시해 주었던
그 수사관은 바로 앵두의 고등학교 한 해 후배였단다, 오호 애재라!
본인으로선 차마 자신의 신분을 앵두에게 말할 순 없었을 테고
선배를 고문하고 폭압하는 현장에 있어야하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안타까웠으랴 !
그랬던 것 같다. 이십여 일간 머문 그 악몽 같던 남산의 지하실에서
앵두를 담당했던 여덟 명의 수사관들 중에
앵두에게 단 한 차례의 손찌검조차 하지 않았던 유일한 수사관,
다른 수사관들로부터 억압을 받을 때면
측은지심의 눈빛으로 앵두를 바라보곤 하던 수사관,
그가 바로 앵두의 고등학교 후배였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삼신 할매는 앵두를 결코 그냥 버려두진 않으셨다.
바로 그렇게 앵두의 고등학교 후배였던 안기부 수사관의 모습으로 분신하여
고립무원의 지옥 같은 곳에서도 앵두의 손을 잡아 주셨던 것이었다.
내 사랑 삼신 할매 만세, 만세, 만만세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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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몸살 - 마지막 이야기








앵두에겐 아홉 살 난 외동 딸래미가 하나 있다.
5년여를 삼신 할매께 빌고 빌어 만난 늦둥이다.

그 아이가 한 번은 심한 열병을 앓았다.
다급한 마음에 병원엘 다녀와서 어무이에게 알렸더니
어무이는 고춧가루와 쑥과 노가리(?)를 들고 와서는
여러 가지 생소한 의식을 행하셨다.
고춧가루를 쑥에 섞어 태운 연기로 아이의 몸 주변을 휘젓거나
노가리로 아이의 등짝과 가슴과 배를 쓸어내리기도 하셨다.
그 어떤 종교적 의식이나 행위와도 담을 쌓은 유물론자인 앵두로선
무슨 대단한 기대를 걸었던 건 아니었다.
손녀를 향한 애정과 지성으로 행하는 어무이의 샤마니즘적 의식을
그저 지 자식 무탈하기만을 바라는 경건한 맘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의사가 처방해 준 약발 탓이지 어무이의 액막이 탓이었을까마는
어쨌든 아이는 다음 날 상당한 차도를 보이며 똘망똘망해졌다.

앵두는 요즘에도 어무이가 무슨무슨 날이라며 처방해주는
희한한 액막이 의식들을 군소리 없이 따를 때가 있다.
좋은 일을 기원하며 향과 초를 피우거나
지신에게 막걸리 한 사발 올릴 때도 있고
새 가구를 들이거나 궂은 일 끝엔
나쁜 기운을 없앤답시고 소금과 고춧가루가 혼재된 쑥향을 피울 때도 있다.
그저, 따라주는 것으로 어무이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다.
고교 졸업 후 언제 내가 어무이의 뜻을 따라 산 적이 있었던가.
그랬다, 돌아보면 지난 날 앵두가 처했던 숱한 위기의 순간순간마다
앵두를 지켜주던 그 삼신 할매는 바로 어무이였던 것이다.
앵두가 성장의 몸살들을 잘 극복하고 건강하고 무탈하게 잘 살고 있는 건
그 모두 어무이의 간단없는 사랑과 음덕(蔭德)을 입은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아니 믿고 있다.

사람이 지 자식을 키워 보면 어버이의 사랑을 안다던가.
앵두는 아직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내 새끼를 낳고 키우는 지금에도 여전히
어무이의 심정을 잘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은 듯하다.
아직도 한참은 더 성장이 필요한가 보다.
앵두가 앞으로도 얼마나 더 성장해갈지는 모르겠다.
바라는 게 있다면 그 성장의 끝 모습은
마을을 수호하는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는 못될 지라도
길 가다 더위에 목마른 나그네가 목을 축이러 우물가에 들렀다가 돌아설 제
새콤달콤한 앵두 한 알 입에 떨궈주는 우물가에 선 앵두나무가 되고 싶다.
어느덧 성장의 몸살을 앓아가는 내 아이에게는
내 어무이처럼 든든한 삼신 할매가 되어주고 싶기도 하고.

-----성장의 몸살 연재를 마치며 앵두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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